• 하정우는 이렇다할 '히트' 작품 없이 예측불가한 '롤러코스터' 같은 '시간'을 보내다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를 만나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들어내며 현재 '멋진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나라 '국가대표' 배우이다.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맞춤 옷을 입은 것처럼 꼭 맞는 그가 이번엔 사기꾼 백작으로 완벽한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자신의 다섯 번째 칸 영화 '아가씨' 개봉을 앞두고 만난 하정우는 진지함과 유머를 오가는 대답과 강약을 조절하는 센스로 인터뷰를 지루하지 않고 유쾌하게 풀어나갔다. 그는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느리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 칸과 함께한 하정우 10년史

    제69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공식 초청된 '아가씨'는 하정우의 다섯 번째 칸 진출작이자 두 번째 경쟁부문 진출작이다. 10년 전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제59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섹션에 초대됐으며, 김기덕 감독의 '숨'은 제60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하정우는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가 제61회 칸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대돼 3년 연속 칸에 입성하는 주인공이 됐다. 이후 '황해'가 제64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섹션에 이름을 올리면서 네 번째 칸 레드카펫을 밟았다. 

    "비경쟁 부문에 초청된 영화 '곡성'의 나홍진 감독과는 만나지 못했다. 내가 입국하는 날 '곡성' 팀이 출국했다. 10년 전 '용서받지 못한 자'로 칸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지원없이 너무 열악했다. 당시 '괴물'과 '주먹이 운다' 팀을 따라다니며 밥을 얻어먹었다. 막차를 놓쳐 버스정류장에서 막춤을 추면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당시 윤 감독과 '나중에 꼭 같이 경쟁부문에 오자'고 서로 파이팅했는데, 10년 만에 가니 감회가 새롭더라. 칸에 갈 때 윤 감독이 제일 많이 축하해줬다."

  • # 하정우, 박찬욱 감독을 만나다

    나홍진-윤종빈-최동훈 감독의 페르소나였던 하정우는 이번 '아가씨'를 통해 박찬욱 감독과 처음으로 만났다. '아가씨'는 프레임에 담기는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는 섬세한 미장센을 매 작품마다 선보여온 박찬욱 감독의 첫 시대극이기도 하다. 박 감독은 영화 주요 배경이 되는 아가씨의 저택을 일제강점기로 대표되던 1930년대의 전형성에서 벗어나 동서양의 문화,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매혹적 세계로 구현했다.

    "영화 '암살' 미팅 때 '아가씨'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박찬욱 감독님과 작업을 한 적 있는 안수현 프로듀서가 고깃집에서 내게 스케줄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봤다. 그때가 8월 셋째 주였는데, 10월 15일에 시나리오를 보내겠다고 날짜를 확정하더라. 그날이 되자 박찬욱 감독님이 '어제 각색이 끝나서 처음으로 보낸다'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노트북이나 태플릿 PC로 보면 느낌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종이로 출력해서 시나리오를 읽었다. 상업스릴러 같았고 재미있었다. 내 역할도 작품 안에서 꼭 필요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저녁에 소속사 사무실로 연락해서 이 작품을 하겠다고 결정했다."

    "상해에서 영화 '암살'을 찍은 후 종로의 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박찬욱 감독님을 만났는데 어색했다. 내가 강남 촌놈이라 종로는 낯선 동네였다. 큰 룸에 둘이 앉아 있으니 뻘쭘하고 분위기가 썰렁해서 대학 후배인 전계수 감독을 불렀다. 그때부터 마음이 편해지더라. 시간이 지난 후 감독님이 신인여배우 오디션에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촬영이 겹쳐서 못갔는데, 최종에 오른 프로필 6명에는 김태리가 없었다. 몇 주 오디션을 계속 보고, 드디어 발견한 것 같다고 하셨다. 그때 김태리 사진을 처음 봤다. '암살' 안성 세트 촬영 후 집에 들어가는 중에 김민희가 캐스팅 됐다는 연락을 받았고, 이후 조진웅으로부터 '나 그거 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다. 후견인 코우즈키 역은 그 나이에 어울리는 송영창, 이경영 같은 배우를 캐스팅할 줄 알았다."

  • # 일본어 연기, 대사는 네이티브 수준으로

    영국의 소설 '핑거 스미스'가 원작인 영화 '아가씨'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된 귀족 아가씨(김민희)와 아가씨의 재산을 노리는 백작(하정우), 백작에게 거래를 제안받은 하녀(김태리)와 아가씨의 후견인 이모부(조진웅)까지. 돈과 마음을 뺏기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네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 하정우는 철저한 대본 분석과 탁월한 캐릭터 소화능력으로 전에 없던 새로운 매력의 '백작'을 만들어냈다. 

    "일본어 대사 양이 많아서 크랭크인 4개월 전부터 레슨을 받았다. 나와 조진웅, 김민희-김태리가 한 팀이 돼 일주일에 4회씩 제작사 사무실에서 수업을 받았다. 감독님이 레벨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칠판에 체크했는데 그게 압박감이 컸다. 진도가 나가면서 바로 대본 리딩을 시작했다. 중간에 일본 배우를 섭외해서 전체를 녹음해 청취를 하고, 그 배우의 억양이 베일까봐 또 다른 배우를 섭외해 들었다."

    "현대에서 쓰는 일본어가 아니라서 일본어학과 교수님이 단어 하나하나 감수했다. 평소 들었던 일본어보다 더 각이 있는 것 같다. 백작이 내뱉는 대사는 뭔가 딱딱하고 문어체적인 표현이 많다. 시대극이지만 백작을 리듬감 있고 능글능글한 현대인처럼 표현하는 게 숙제였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후시 녹음도 이렇게 많이 한건 처음이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 일본어 대사 반 이상을 수정했다."
    # "우리 동네에서 순진한 건 불법이거든요"

    영화에서 백작은 부모를 여의고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게 된 귀족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3년간 준비를 한다. 하정우가 연기하는 백작은 일본인 귀족은커녕 제주도 머슴과 무당 사이에서 태어난 사기꾼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선 누구든 이용하는 야망가 백작 캐릭터에 특유의 유머러스함과 섹시함을 더해 악역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매력적인 인물을 완성했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첫 번째가 스토리다. 스토리가 좋으면 캐릭터도 좋아질 수 밖에 없다. 캐릭터는 어딘가 결핍이 있는 인물에 끌리는 것 같다. 영화 '멋진 하루', '비스티 보이즈', '암살' 등에서 연기한 인물이 모두 집도 소속도 없고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에 흥미가 있다. '아가씨'의 백작은 사기꾼이고 나쁘기보다는 안쓰러웠다. 양식당에서 아가씨에게 '가격을 보지 않고 포도주를 주문하는 태도?'라고 말하는데, 백작이라는 캐릭터의 많은 것이 담긴 대사인 것 같다. 고판돌이라는 이름을 얼마나 지우고 싶었을까. 연민이 느껴지면서 이해가 됐다.

  • # 그 영광의 무게를 이겨내라

    배우로 시작해 영화감독, 화가까지 자신의 자리를 넓혀오고 있는 하정우의 내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2003년부터 미술 활동을 시작한 그는 2010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내외에서 100여 점의 그림을 선보여 왔다. 자신의 영화 속 역할에 대한 이미지와 심리상태를 표현한 '킵 사일런스(Keep Silence)'라는 작품은 최근 경매에서 1천4백만 원에 낙찰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의도치 않게 자신의 그림 가격 소식이 기사화된 것에 대해 다소 부담스러워했다.

    "다른 전업 작가에게 미안했다. 그런 기사가 나면 한없이 민망해지고 부끄러워진다. 미술계 담당 기자에게 가끔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는데, 그럴 자격이 안돼서 고사하고 있다. 그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하정우는 영화 '황해', '범죄와의 전쟁' 등을 통해 맛있게 먹는 연기로 '하정우 먹방'이라는 수식어를 낳으며 '먹방'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탄생시켰다. 그는 이번 '아가씨'에서도 '복숭아 먹방'을 선보였고, 또 한 번 연관 검색어에 떴다. 

    "먹방 때문에 몰입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관객들은 그걸 뛰어넘었고,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기까지 했다. 배우 생활하면서 과정이고 선물이고 별책부록이다."

  • # 영화 100편을 향한 굳건한 비상

    배우로서 영화 100편을 찍는 것이 목표라는 하정우는 '롤러코스터'(2013), '허삼관'(2014)을 통해 감독으로 활동하며 스스로도 짐작할 수 없는 크기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다. 하정우는 현재 '터널', '신과 함께, '앙드레김', 'PMC'(가제) 등 개봉과 촬영을 앞두고 있는 영화만 무려 4편이다.

    "100은 상징적인 숫자다. 축구 국가대표 선수도 A매치 100게임을 뛰면 센추리 클럽에 가입하지 않나. 선구안이 뛰어나서 10타수 10안타를 치면 좋겠지만, 작품을 통해서 학습을 하고 발전하는 게 훨씬 의미가 있다. 다작을 하다 보면 완벽에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하정우의 차기작 '신과 함께'는 인간의 죽음 이후 저승 세계에서 49일 동안 펼쳐지는 7번의 재판 과정 동안, 인간사에 개입하면 안 되는 저승차사들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일에 동참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주호민 작가의 동명의 웹툰이 원작으로 '미녀는 괴로워', '국가대표'를 연출한 김용화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하정우는 저승차사의 리더이자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고민하는 '강림' 역을 맡아 차태현, 주지훈, 마동석 등과 호흡을 맞춘다.

    "영화 '신과 함께'를 8개월 정도 찍는데, 배우들과 사적인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다. 차태현 형은 내 동생(차현우)과 친하다. 동네에 같이 살아서 알고 지낸지 오래 됐다. 동네 형 같은 사람이다. 마동석은 동네 누나다. 주지훈은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났는데 매력적이고 살갑더라."

    하정우는 마지막으로 차기 연출작에 대해 귀뜸했다. 3년 동안의 스케줄이 꽉 차 있기 때문에 빠르면 3~4년 후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신작은 '롤러코스터' 같은 저예산 작품이 될 것 같다. 한인회장을 주인공으로 한 코리아타운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장르는 블랙코미디다. 계속 구상중이다."

    [사진=뉴데일리 정상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