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한국행도 북한 눈치 보다 베트남 루트 막혀"

  • 목숨을 걸면서 북한을 탈출하고, 그리하여 북한인권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탈북자들을 ‘배신자’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는 과연 어디일까?
    북한뿐일 것이다.

    그런데 그 ‘배신자’라는 말이 대한민국 서울에서, 그것도 현직 국회의원 입에서 나왔다.
    2012년 6월 제1야당인 통합민주당 국회의원 임수경이 탈북청년 백요셉에게 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모든 탈북자들과 시민단체들은 들고 일어나 절규하며 시위를 하였다.
    ‘우리를 배신자라고 부르는 임수경은 어느 나라 국회의원이냐?’ ‘너의 조국 북한으로 돌아가라“며 시위를 벌였는데 일반 국민들도 ’기가 막히다.‘는 반응으로 경악하였다.


  • 이렇듯 탈북자를 불편해하고 심지어 ‘배신자’라고 부르는 인식은 매우 뿌리가 깊다.
    1990년대 중반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는 대형 아사사태가 발생하면서 탈북자들이 급증하였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갑자기 늘어나는 탈북자들의 정착지원을 위해 200명 수용규모의 하나원 건설 예산안을 1996년 예산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는 극렬하게 반대했었다.
    북한정권의 심기를 건드릴 것을 걱정한 것이다.

    그 야당이 정권을 잡고 햇볕정책을 취하면서 유엔과 국제사회 모두가 규탄하는 유엔 북한인권 결의안에 부정적 행태를 보인 것은 그들 논리에 따르면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통일원 조직 안에 신설되었던 인도지원국도 해체하여 과단위로 축소시키는 등 노골적인 거부감을 보였다.


  • 2004년 7월 27일과 28일 베트남에 체류하던 468명 탈북자를 2대의 항공기로 대거 입국시킨 사건이 국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베트남 정부는 보안을 안 지켜서 북한으로부터 맹비난을 받아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는 구실로 그 이후 탈북자들의 베트남 경유 루트를 닫아버렸다.

     


  • 실은 중국을 통해 메콩지역으로 탈출한 탈북자들이 베트남으로 많이 입국하게 되었고, 매월 수십 명 수준으로 한국대사관에 인계되어 한국행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통일부 장관 정동영)는 북한정권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한국입국자 수를 제한하게 되자, 베트남의 수용소에 머무는 숫자가 5백 명 가까이로 늘어나 폭발직전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단의 조치로 한꺼번에 대량 수송작전을 벌인 것이다.
    당초부터 누적현상을 피하고 일정수의 인원을 꾸준하게 받아들이면 되었을 것을 북한 눈치를 보느라 미루다가 긁어 부스럼을 낸 셈이다.

    베트남 루트가 막히자, 이번에는 태국을 경유하는 탈북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2007년 4월에는 태국의 수도인 방콕 소재 난민수용소의 여자수용시설의 초 과밀사태가 언론에 보도된 것이다.
    본래 100명 수용규모에 화장실이 한 개밖에 없는 공간에 탈북여성이 400여명이나 수용되었다.
    열대지방의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을 겪고, 한국행이 지연되는데 항의하는 농성까지 하였다.
    심지어 발을 편히 뻗을만한 좋은 자리는 자릿세를 내고 거래할 정도였다.

    한국 외교부의 담당관은 태국정부가 한국행 허가를 제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라고 설명하였다.
    탈북자들이 너무 수월하게 한국으로 인도되면 가뜩이나 난민문제로 골치를 앓는 태국이 난민들의 외국탈출을 위한 통로로 변할 것을 우려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이 2007년 10월초 필자와 이영환 팀장을 현지에 파견하였다.
    이 조사단이 태국인권위원회 위원장과 북한인권특별보고관 비팃 문타폰 교수를 면담하여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태국인사들은 문명국인 태국의 수치라고 인정하였다.
    그 직후 태국경찰청장이 불시에 문제의 방콕난민수용소를 방문하여 현장상태를 확인하고, 책임자인 수용소장을 즉각 파면조치하였다.

    노무현 정부가 끝난 다음 그러한 과밀수용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한국행 출국숫자를 점차 늘려 반년 만에 수용인원을 정상수준으로 안정시켰다.
    탈북자가 도착하여 도움을 청하면 한국대사관이 보호해서 태국 측 난민수용소에 인계한 후 태국의 국내절차를 거쳐 한국이든 미국이든 그들이 원하는 목적지로 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탈북자들은 수용소 안에서 한국의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사전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는 한국에 입국하는 전체 탈북자의 9할 정도가 태국을 경유하고 있다.
    본래 태국은 미얀마 소수민족을 비롯한 외국난민이 2백만 명이 체류하고 있다.
    연간 2천명 규모의 탈북자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 탈북자들은 한국정부가 데려오므로 다른 난민처럼 큰 부담을 주지 않는다.

    이렇게 탈북여성의 과밀수용으로 인한 2007년 사태는 태국정부가 출국허가를 제한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라 햇볕정책 당시 한국정부가 받아들이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무성 기밀전문도 이를 반증하고 있다.
    2007년 11월 21일 유엔총회 북한인권결의안에 기권투표하기 2개월 전 9월 17일 태국 치앙마이주재 마이클 모로우(Michael Morrow)총영사의 비밀보고는 연간 1400명 규모로 태국으로 들어오는 탈북자의 인수를 한국정부가 외면한다는 내용이다.(http://www.koreatimes.com/article/1019662)


  • 탈북자의 입국 억제는 해외를 통한 경우에 국한되지 않는다.
    북한에서 직접 한국으로 들어오려는 경우에도 많았다.
    햇볕정책 기간 중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자주 일어났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2주일 전인 설날 2008년 2월 8일 새벽 북한주민 3가족 22명을 NLL을 넘어와 한국해군이 구조하였다.
    이들을 만 하루도 되기 전에 북한으로 송환시킨 사건이 있었다.
    실제 이들의 귀순의사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는 8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집단 탈북자들의 의사확인은 두명 이상을 함께 조사할 경우 후환이 두려워 속마음을 밝히지 않기 때문에 탈북자에 대해서는 개별신문이 필수적이다.
    개별신문을 거쳐 다시 다른 사람에 대한 조사와 대조를 하여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격리된 상태에서 한사람에 최소한 하루는 걸려야 한다.
    탈북자나 인권단체들은 당시 한국정부의 성급한 조치를 이해할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2006년 작은 배로 서해를 통해 남한으로 귀순한 탈북인사는 2000년대 중반 황해도 지역에서는 탈북자가 한국해군에 구조되면 다시 북한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은 한국해군함정에 발견되지 않기 위해 안개 짙은 날을 택해 NLL을 훨씬 지나서 인천 앞바다의 섬까지 도착하여 귀순에 성공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의 항의가 잇따르자 국가인권위원회는 관계당국이 상기 3가족 22명을 북한으로 단시간 안에 송환시킨 조치에 대하여 절차상 사소한 실수는 있었지만, 그들의 자유송환의사 확인 과정에 잘못은 없었다고 판정하여 관계 당국의 송환조치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었다.
    송환된 22명이 안전하게 지내는지, 아니면 처형되었는지 사후확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김 석 우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북한인권시민연합 고문, 前통일원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