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 ③ 중공군 참전 전후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 포럼 대표

    “일개 월남한 청년이 장군이 되어 1만 5,000여 한·미 장병을 지휘하여
    고향을 탈환하러 진군하는 감회를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
     이런 금의환향(錦衣還鄕)이 또 어느 역사에 있었을까, 금빛 준장계급장을 단 30세  청년
    백선엽은 제1사단장으로 앞장서서 꿈에 그리던 고향땅 대동강을 건너 적군의 수도 평양 시내를
    완전 점령한 것이 10월19일 아침이었다.
    그날도 궂은 비가 질척거리는 거리에는 어릴 때 추억 대신 눈뜨고 볼수 없는 처참한 광경에
    악취가 엄습해왔다. 패주하는 북한군이 집단학살한 시체들이 즐비했고 우물마다 가득 넘쳤다고 기억한 백선엽은 “그래도 그렇게 통일되는 줄 알고 얼마나 벅찼는지 모른다”고 했다.
  • 평양탈환작전을 지휘한 백선엽 1사단장.(자료사진)
    ▲ 평양탈환작전을 지휘한 백선엽 1사단장.(자료사진)
바로 그날 밤 중국땅 단동,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고 검은 물결이 출렁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압록강 다리를 군용 찦차 한대가 북한쪽으로 조심스레 달리고 있었다.
차에 탄 사람은 누런 중공군복을 입은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
보통키에 통통한 52세 조선군지원군 총사령관, 혼자 강을 건넌 그는 신의주를 거쳐
수풍댐 발전소 근방에서 대기하다가 평안북도 운산(雲山) 금광지대로 도망쳐와 숨어있는
김일성을 찾아가 만날 수 있었다. 
구세주를 만난 듯 감사 인사를 하는 김일성에게 펑은 간단히 지원상황을 설명하였다.
이번에 1단계로 26만명이 들어왔고 곧 8만명이 더 들어올 것이며 2단계 3단계로 지원군 규모는 도합 60만 대군이 된다고하자 감격한 김일성은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고 한다.
펑 사령관은 북한군이 겨우 3개사단만 남았는데 전부 긴급 보충한 신병들이라 미군이 북진하면
속수무책이라는 첫 보고를 베이징(北京)의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에게 보냈다.
  • 중공군 자셜관 펑더화이(왼쪽)와 김일성.(자료사진)
    ▲ 중공군 자셜관 펑더화이(왼쪽)와 김일성.(자료사진)
  • 38선이 무너지자 김일성은 평양철수 명령을 내리고 한만국경으로 도주해 숨었으며,
    소위 임시수도로 정한 국경도시 강계(江界)와 만포진(滿浦鎭)으로 이어진 일대는
    패잔병 병사와 피난민과 가축들까지 뒤엉켜서 아수라장이었다.
    평더화이의 1차 목표는 한국군이다. “미군 말고 괴뢰군부터 공격하라”
    마오는 한국군을 괴뢰군이라 부르며 작전지침을 내렸다. 펑은 그에 따라 공격준비를 마치고
    곳곳에 병력을 매복시킨 뒤 한국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장비와 전력이 약한 한국군이 국경진격을 서두르고 있는 약점을 집중타격하여
    미군의 손발을 잘라버리고 전세를 만회하자는 작전이다. 
    한국군이 나타났다. 중공군이 들어온 줄을 까맣게 모른 채 압록강 점령을 다투어 맹렬히 북진하는 부대는 제1사단, 6사단, 8사단이었다. 숨어서 기다리던 중공군 수십만명이 북진에 지친 국군부대를 사방에서 덮쳐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다. 한국전 참전 중공군의 제1차 대공세,
    졸지에 예상못한 함정에 빠진 국군들은  엄청난 피해를 내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국경도시 초산에 태극기를 꽂고 압록강 물을 경무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던 6사단,
    고향이자 적의 수도인 평양을 탈환한 기쁨에 기세좋게 진격하던 백선엽의 1사단도
    맥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이때서야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을 눈으로 확인하고
    국군과 유엔군에게 청천강 라인까지 전면후퇴 명령을 내렸다.
    통일을 장담하고 믿었던 한미연합군 눈앞에서 통일이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 마오는 오래전에 참전 결정 "조선은 순망치한의 땅"

    오늘의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習根平 습근평)은 지난 8월1일 건군기념일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인민해방군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에서 승리하여 국위를 떨쳤다.”
    항미원조란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지원한다’는 말로 ‘6.25전쟁서 승리했다’는 말이다.
    최근 미국이 ‘북한 제재’를 강화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은 북한제재 실천은 안하고 말뿐”이라고 정면으로 압박하자 시진핑이 간접적인 역공을 가했다는 관측이 각국에서 나왔다. 
    또 시진핑은 북한과 중국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란 발언도 몇번인가 했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리다’는 순망치한은 요컨대 ‘중국과 북한은 한몸’이란 뜻이다.
    옛날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晉)나라가 우(禹)나라를 공격할 때 나온 이 말은
    임진왜란때 명나라도 조선출병하면서 써먹었고 장개석도 임시정부 김구를 지원하면서 사용했다.

    지금부터 67년전 1950년 10월 초 중공 주석 마오쩌둥도 이 말을 되풀이 했다. 
    북경으로 숨차게 달려온 북한의 박헌영이 김일성의 편지를 내밀자 이를 읽은 마오가
    긴급 수뇌회의를 소집했던 때이다.
    먼저 편지부터 읽어보자.
    다급하게 쓴 듯 삐뚤빼뚤 맞춤법도 틀린 편지는 중공군의 긴급출병을 애원하는 하소연이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으로 밀려들자 김일성과 박헌영은
    허풍을 버리고 허둥지둥 살려달라고 중국에게 매달려야 했던 때이다.

    <다급한 SOS 김일성의 편지>

    적들이 금일 우리가 처한 엄중하고 위급한 형편을 리용하여 우리에게 시간 여유를 주지않고
    계속 진공하여 38도선을 침공하게 되을 때에는 우리의 자체의 힘으로 새는 이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의 특별한 원조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즉 적군이 38도선을 침공하게 될 때에는 약속한 바와 갓치 중국 인민군의 직접 출동이
    절대로 필요하게 됩니다. 이상과 같이 우리의 의견을 당신에게 제이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당신의 회답을 우리는 기다림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김일성 박헌영 1950년 10월1일 펴야시

    평양시를 ‘펴야시’로 적을만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편지를 공개한 마오는 박헌영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스탈린 원수에게 직접 원조 요청을 제출해봤나요?”
    박헌영이 대답했다. “29일 김일성 동지가 스탈린 동지에게 서신을 보내 직접적인 원조가 있어야한다고 말했습니다만...스탈린 동지는 이 문제를 마오 동지와 상의해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니까 김일성은 사흘 전 스탈린한테 퇴짜를 맞고 스탈린이 시키는대로 마오에게 편지를 또 써서 박헌영을 베이징에 보낸 것. 내용이 대동소이한 소련용 편지는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만일 적이 조선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면 우리의 자력으로는 적을 막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귀하에게 특별한 지원을 부탁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적군이 38도선을 넘을 때에는 소련의 직접적인 군사원조가 매우 필요합니다. 혹시 어떤 이유로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의 투쟁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중국이나 그 밖의 인민 민주주의 국가의 국제의용군 부대를 조직하는 것을 원조해주시도록 부탁드립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김일서 박헌영 1950년 9월29일

    '통일 장담' 김일성 "중국 참전도 필요 없을테니 걱정 마시오"

    마오는 진작부터 스탈린에게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으며 그 스탈린에게만 매달리는 김일성을 괘씸하게 생각해 왔다. 1949년 10월 1일 국민당을 내쫓고 공산당정권을 수립한 뒤 스탈린 생일 축하겸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는 냉담하게 대하는 스탈린이 몹시 서운하였다.
    또한 다음해 5월 김일성이 찾아와 스탈린으로부 남침전쟁을 허락받았다며 중국도 협조해달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큰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마오 동지, 걱정 마십시오. 사흘이면 서울을 점령할 것이고 인민봉기가 일어나 한달 내로 통일은 문제없습니다. 중국 인민군이 참전할 필요도 없을 테니 맡겨주십시오.”라고 장담까지 했다.
    “잘 해보시오” 격려해준 마오는 그러나 남모르게 혼자만의 전략을 짜놓은 바 있었다.

    천안문 서쪽 호수를 끼고 있는 중국 지도층의 거주지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중앙당 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이틀 연거푸 회의는 “조선전쟁에 출병하느냐 마느냐” 논쟁이 이어졌다.  
    내전의 주역인 주더(朱德 주덕) 류샤오치(劉少奇 유소기), 천윈(陳雲 진운) 등이 신중론을 폈고,
    린뺘오(林彪 임표)는 반대론을 꺾지 않았다. “장기간 내전에 피로한 군은 휴식해야 하고 건국 1년도 안됐는데 기름 들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격”이라며 “소규모 출병하되 싸움은 안된다”고 주장했다. 눈치 빠른 신중파 부주석 저우언라이(周恩來 주은래)는 항상 마오의 편이다.
    일본 항복후 만주에서 장제스(蔣介石) 정부군과 싸울 때 도와준 조선에 보답해야 한다고 설득에 나섰다. 마오는 “모두 일리 있는 말이다”며 회의를 끝냈다.
    세계최강 미국과의 전쟁 결정은 쉽지 않았지만 게릴라전의 귀신 마오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다음날 그는 입을 열었다.
    “북조선을 잃는다는 것은 입술이 없어져 이가 춥고 문이 부숴져 집안이 위태로운 격,
    순망치한 호파당위(脣亡齒寒 戶破堂危)로서 동북지방이 묶이고 만주 전력(電力)이 막힌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당연히 참전해야 하며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 안하면 손해가 지극히 클것이요, 참전하면 이보다 큰 이익이 없을 것이다.“
    마오가 결단을 내린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조선 남반부에서 반공(反共)세력을 없애는 것은 중국의 반공정권 장제스를 추방한 것과 같은 중국해방전쟁의 연장선상일 뿐더러. 또한 “우리 동풍(東風)을 일으켜 서풍(西風), 즉 유럽의 강자 스탈린을 제압하는 장기전략이 필요한 때가 왔다.” 마오는 되풀이 중얼거렸다.
    “소련군이 참전하지 않더라도 중국은 참전한다. 아니 스탈린이 조선에서 손을 떼도록 하는 것이 중국에 가장 좋은 일이다.”

    마오, 6.25 전부터 참전할 준비 완벽히 끝내다

    교활하고 치밀한 전략가 마오의 참전준비는 사실 “때가 되면 돕겠다”고 김일성에게 약속한 시점 1949년 여름부터 시작된 것으로 자료들이 구체적으로 일러주고 있다.
    6.25남침이 터지자 우선 국공(國共)내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제4군을 동북(만주) 국경지대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7월10일이다. 모두 24개사단으로 편성한 제13병단은 8월초부터 북한 투입을 위한 정치교육과 현지적응 훈련을 시작하였다.
    8월30일 동북변방군을 70만명으로 증원하고 북한에 정찰대를 보내 정보수집반을 가동했다.
    정찰팀은 “낙동강까지 잃은 미국이 절대로 실패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북조선군은 후방이
    너무 약해 고립되면 후퇴도 어려울 것”이라 보고하였고 “미군이 상륙작전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면서 ”전략부대는 항상 출동명령에 대기하라“는 전령을 보냈다.
    중국측의 군사전략적 충고를 무시하며 승승장구를 뽐내던 김일성은 서울을 내주고 평양에서 탈출한 뒤에서야 부랴부랴 스탈린과 마오에게 SOS를 날렸던 것이었다.
    마오는 10월2일 펑더화이를 조선지원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10월8일 김일성에게 출병결정을 알렸다. 중공군의 참전은 김일성의 요청에 응하는 형식이었지만 마오는 진작부터 “조선전쟁은 내가 싸운다”고 결심한지 오래였다는 사실이 625전쟁의 또 하나의 역사적 성격을 말해준다.
  • 중국 마오쩌둥과 소련 스탈린.(자료사진)
    ▲ 중국 마오쩌둥과 소련 스탈린.(자료사진)
     스탈린의 전쟁---> 모택동의 전쟁--->시진핑의 한반도?

    6.25전쟁은 북한 김일성이 소련의 지원으로 일으킨 남북한 전쟁이 아니다.
    6.25전쟁은 처음부터 ‘스탈린의 전쟁’이다. 기획-연출-감독이 소련 스탈린이다.
    미국과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미국과 싸우지 않고 한반도를 먹기 위해,
    스탈린은 온갖 위장술과 거짓말과 사기 흥정과 가짜들을 꾸며낸 것뿐,
    그 허위선전의 진실들은 소련 붕괴후 그들의 기록들이 증언하고 있다.
    동유럽과 극동의 공산화를 동시 진행한 스탈린은 김일성을 충동질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그게 안되니까 중국을 원조로 꼬득여 끌어들였다. 마오쩌둥이 바보인가? 
    3차대전이 무서웠던 스탈린의 전쟁은 어쩔수 없이 마오의 전쟁, 세계대전이 되었고,
    오랜세월 한반도를 탐내던 두 마리 짐승이 드디어 한꺼번에 덤벼든 꼴이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긴 종속국 조선을 다시 찾으려는 중국의 야욕!
    러일전쟁으로 일본에 내준 ‘작은 제국’ 대한을 다시 편입하려는 소련의 흉계!
    혼자서 몸부림치는 이승만은 통일이란 독립목표를 이번엔 이룰 수 있을 것인가.
  • 군복 입고 사열하는 시진핑 중국주석.ⓒ연합뉴스
    ▲ 군복 입고 사열하는 시진핑 중국주석.ⓒ연합뉴스

    중공 인해전술...미국 최대의 참패 '장진호 전투'

    중공군의 제2차 대공세는 11월 25 시작되었다. 여기서 유명한 장진호 전투가 벌어진다.
    저항다운 저항도 없이 패주하는 북한군을 국경까지 밀어붙인 국군과 유엔군의 마지막 목표는
    김일성의 임시수도라는 강계와 만포진, 개마고원의 험준한 산악과 계곡에는 적군대신 더 무서운 적이 추위와 눈과 지형이었다. 미 해병사단 1만2천여명이 진을 친 장진호 협곡에 중공군이 쏟아져 들어왔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강추위 속에 잠들었던 미군은 어둠을 울리는 피리소리 북소리에 깨어 전투 개시, 장장 보름동안의 백병전이 밤낮으로 계속된 혈전이다.
    세계에 유례없는 보도듣도 못한 인해전술(人海戰術)에 미 해병대는 고스란히 당하고 말았다.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듯 공동묘지 강시처럼 몰려오는 인간 총알받이들이
    거구의 미해병대를 떼로 덮쳐 난자하는 잔혹한 살육전의 피바람이 개마고원을 뒤덮었다.
    “미군 1명에 4명”-이것은 마오의 인해전술 계산, 병사는 무궁무진, 내전이 끝난 중국군은 540여만명이고 그중에 장제스 군사가 2백만명이므로 과잉병력을 처리해야하는 경제적 이유가 인해전술로 나타난 것이었다. 전투라기보다 병력 대량소비작전인 셈이다. .
  • 끝도 없이 밀려드는 중공군 인해전술.(자료사진)
    ▲ 끝도 없이 밀려드는 중공군 인해전술.(자료사진)
    11월25일 기자들에게 “크리스마스까지는 병사들을 집에 돌아가도록 약속을 지키겠다"며
    맥아더는 열흘 정도면 이 전쟁은 끝난다고 호언하였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부터 쏟아지는
    황당한 전황보고에 경악한 맥아더는 “우리는 중공군 20만과 싸우고 있다”고 발표, 전세계를 놀라게 한다. 유엔 안보리가 소집되고 애치슨도 임병직 외무장관도 영국도 ‘중국 침략’을 규탄하였다. 분노한 미국대통령 트루먼은 30일 “원자탄 사용 고려”라는 폭탄발언을 터트린다.

  • 트루먼 대통령 중대발언
    원자탄 사용 고려 / 한국은 절대 불포기 (조선일보 12월2일자)

    [워싱톤1일발 AP특전 합동] 트루만 대통령은 30일 기자단과의 주례회견석상 “필요한 단계에는 중공군에 대하여 원자탄을 사용하기 위하여 모든 적극적인 고려를 하도록 명하였다”고 말하였는 바 그는 계속하야 3차대전은 피할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표명하였다.
    트루만 대통령은 또한 맥아더 장군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고 명백히 태도를 표명하였는데
    맥아더 장군은 주로 해외로부터 약간의 비평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을 국무장관 애치슨씨가 무어라고 평을 가하고 있다는 3명의 공화당 상원의원의 불평을 통렬히 비난하였다. 트루만 대통령은 자기 성명 중에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인하여 앞으로 더 후퇴할지 모르나 유엔군은 한국에 있어서의 사명을 포기할 의도는 하나도 없다고 언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한 만일 중공의 침략이 한국에서 성공한다면 우리는 동 침략이 전아이사는 물론 구라파 나아가서는 미대륙에까지 확대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대통령은 “우리는 우리나라의 안전과 한국 생존을 위하여 한국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한편 트대통령은 급속히 증가한 예산을 지급히 고려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은 중공의 대한침략 책임이 소련에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중국인민이 이 이상 소련의 아시아에 있어서의 식민정책에 굴복 또는 기만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는 또한 국가적 단결을 호소하여 모든 시민은 미국이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위한 희망이 관건임을 인식하고 모든 의견차이를 배제할 것을 요청하였다.......(하략)

    "원자탄 투하 권한은 맥아더 재량에 맡기겠다"

    발표를 마친 트루먼은 기자들의 질문에 “원자탄 사용을 위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도록 명하였다. 원자탄 투하 문제는 맥아더 장군의 재량에 맡기겠다”고 밝혔으며, 유엔군의 만주 진격문제는 유엔의 결정사항이라고 덧붙였다.
    세계를 강타한 ‘원자탄 발언’ 파문이 들끓는 가운데 맥아더는 특별성명을 발표한다.

  • 선전포고 없는 전쟁 / 중공 대부대와 대결
    맥아더 장군, 기자단에 특별성명 (조선일보 1면 12월4일자)

    “현재 중공군과 유엔군 사이에는 선전포고없는 전쟁상태가 존재하고 있으며
    공산군은 한국전투에 60만 군대를 투입하고 있다. 나의 의견으로는 이는 새로운 적 새로운 군대와의 새로운 전쟁인 것이다. 공산군은 현대적 무기로 훌륭히 장비하고 있다.
    한국내의 적군은 중공군만도 50만이나 된다. 공산군을 그 수에 있어서 아군을 압도하고 있으며
     또한 현대적인 성능 좋은 무기로 완전무장하고 있다. 유엔군의 철수는 지상에서 아군을 완전히 능가하고 있는 압도적인 적의 병력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북한 괴뢰군의 패잔병까지 계산에 넣으면 유엔군은 합게 약60만 군대와 대전하고 있는 것이다. 철수당시의 정세로서는 어떻게 하면 유엔군의 역경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인지 그 방법을 몰랐다. 
    압록강 이북에 있는 군사목표를 폭격할 권한을 달라고 건의하거나 요청한 일은 없으며
    원자탄 사용 권한을 요청한 일도 없다. 나는 한국에서 어떠한 사태가 발생할지 억측을 내리고 싶지 않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정세하에서 본 사령부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만사를 다 하였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번 신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북한 괴뢰군은 사실상 파멸되었으며
    유엔군의 사명 또한 실질적으로 완수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의견으로는 이는 새로운 적, 새로운 군대와의 새로운 전쟁인 것이다.
    유엔군은 현재 약 14만5천명의 포로를 잡고 있는데 그중 중공군 포로는 불과 3백명도 안된다. 유엔군이 중공에 부닥치기 직전에 개시된 연합군의 공세는 다행한 처사였다.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우군은 완전히 괴멸케하는 것과 같은 대타격을 받을 가능성에 직면하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엔군이 일본인을 사용하고 있다는 소련의 비난은 사실무근이다.“

  •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밀담.(자료사진)
    ▲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밀담.(자료사진)
    ▶ 이승만, 맥아더에게 초전박살 만주 폭격 요구
    타이완에 쫓겨온 장제스가 군부의 반대를 뿌리치고 한국에 파병을 결정한 것은
    “행여나, 이 참에 본토 수복의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뜻밖에 한마디로 거부해 버렸다. 
    3개사단 3만5천명의 타이완 지원군을 안받겠다는 이승만을 보자 부인 프란체스카는 안타까웠다. 이승만은 말했다. “이봐, 내 손으로 중국공산당 군대를 왜 끓어들여. 그동안 당한 것만도 지긋지긋한데...” 타이완군이 오면 그 핑계로 중공군이 들어올 것이며 소련 육상군도 쳐내려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승만은 북한군 혼자일 때 최단시일 내로 통일을 달성해야 하므로 맥아더에게 북진을 독촉하였으며 만주를 빨리 폭격해야 한다는 공통인식에 안도하였다.
    제발 중공군이 참전하기 전에...날마다 기도하던 이승만 눈앞에 그 중공군이 대규모로 침략해오다니 순간 이승만도 당황하였지만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무릎을 쳤다고 한다.
    “차라리 잘됐어. 만주로 진격할 수 있고 중국를 폭격할 당당한 명분이 생겼잖아.”
    오랜 내전을 겪은 중공군이 얼마나 강하랴, 유엔군의 상대가 될 수는 없을 터,
    이승만은 맥아더와 의기투합하였다. 반공과 기독교로 뭉친 두 전략가의 이심전심,
    원자탄을 쓰자, 대륙 공산정권을 멸망시켜 후환을 없애는 기회를 중공이 만들어주었다.
    트루먼이 ‘원자탄 사용 고려’를 발표한 직후 이승만도 서둘러 중대성명을 발표한다.
    국민의 애국심과 단합을 거듭 강조하면서 미국의 원자탄 사용을 은근히 부추기려 하였다..

  • 자유독립 위한 최후의 결전단계 / 합심협력 멸공 매진
    이대통령 중대성명서 발표 (조선일보 1950.12.3일자.)

    중공군의 침범으로 인하여 전국(戰局)은 다시금 확대되어 자유세계의 이목이 한국전투에 집중되고 있는 바 조국의 일대위험에 처하여있는 이때 2일 이대통령은 남북 동포는 일제히 총궐기하여 조국통일의 성업을 완수하기를 요망하는 중대성명서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소련과 중공이 가져온 공산 괴질을 청소하자!"

    “일반 동포들에게 전쟁형편을 간단히 말하려한다
    지난 6월에 공산당이 야심과 테러로서 졸지에 침략해서 전쟁을 시작한 결과 우리가 많은 피해를 당했다 우리가 다 정신과 육신상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있다. 바라기는 이 악독한 전쟁이 끝나고 유엔군의 승리가 완수되는 줄로 믿어왔다. 소련의 괴뢰인 공산당을 우리 국군과 연합군의 노력으로 다 소탕시키고 서울과 평양과 함흥을 다 해방시킨 것이다. 전장에는 적군의 잔재만 남았으므로 군인들과 국민들이 기대한 바는 전쟁은 빨리 지나가고 평화를 회복해서 통일이 완수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공산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을 정복함으로 저의 제국의 한영토를 만들어 세계정복의 초보로 삼고 소련을 중심으로해서 저의 이웃나라들을 강제로 통치하며 그 나라들이 또 이웃나라들을 침략정복하려는 계획이다...(중략)...한국을 첫 단계로 삼아 일본과 싸워 이기고 그 다음에는 아시아 모든 나라들을 테러로 겁박해서 각각 소련의 세력을 부식하여, 월남, 필리민, 태국, 말레이, 인도네시아, 버마, 인도, 파키스탄 등 모든 나라를 다 공산군의 세력을 가지고 차례로 정복하려던 것이다.
    우리 한국에 와서 공산군이 처음으로 항전을 당하게 된 것은 전세계와 우리 충성한 한국인들이 일시에 다 일어난 때문이다...(중략)...사태가 이렇게 되매 공산 제국주의자들이 다시 새 전쟁을 시작키로 작정하였다.
    거대한 중공군이 한국에 몰래 넘어와서 우리를 공격함으로 우리 국군과 유엔군에 많은 손실도 주었다. 유엔군이 다시 정돈하여 극렬히 싸워서 정지시켜 놓았으나 적군이 아직 대다수는 극렬히 반항하는 중이다. 우리 자유와 독립을 위하는 최후결전임을 일반 애국동포들은 다 각오해야 할 것이다. 모든 애국남녀가 먼저 생각할 것은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 꿋꿋하게 싸우자는 것이다. 이 정신이 기미년에도 모든 애국자를 궐기시킨 것이오, 또 오늘 우리 모든 애국자들을 다시 궐기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남녀 물론하고 다 한마음 한뜻으로 이 강포한 원수를 대항해서 우리 역량을 있는대로 다 전장에 공헌해야 될 것이다.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이든지 안전을 유지하는 경찰이든지 
    군수물자를 제조하고 운반하는데 종사하는 사람이나 학교와 병원이나 또는 도로상에서나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우리나라를 위하고 우리 자유를 위하며 온 세계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직책과 영광임을 다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다시 선언하기를 한국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한국에 있는 우리 원수들은 미국의 모든 역량을 다하야 토멸시켜야 될 것이다. 
    이 토멸목적에 필요한 무기는 무엇이든지 다 사용하겠다고 하였으니 우리와 같이 싸우는 13개국의 모든 무력은 다 우리의 자유를 보호해서 싸우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무슨 희생과 고초를 당하더라도 이를 이겨내고 우리나라에 와서 생명을 희생하며 용맹스럽게 싸워서 우리의 자유와 세계의 자유를 보호하려는 우방군인들의 성심에 비해서 못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걱정할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다. 우리가 지나간 경력으로 보아 공산당 침략이 우리에게 얼마나 혹독한 것을 다 알게 된 것이다.
    우리 모든 개인이 다 맹세하고 결심할 바는 공산군은 한인이나 중국인이나 또 어느 나라사람임을 막론하고 다 없어지든지 포로로 잡히던지 또는 우리 국경에서 꽃겨나가든지 해서 다 소탕시키고서야 우리나라는 영원히 살 것이다. 
    전쟁지역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부디 큰길을 피해다님으로 군인들의 무기운반이나 또는 유엔군의 왕래에 장애가 되지 말 것이며 지방에 있는 유엔군 지휘관들의 명령은 혹 어려운 경우가 있을 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진행해주기 바란다. 
    공산군은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될 것임으로 전국민이 한사람처럼 일제히 궐기해서 
    어깨를 겨누고 소련과 중국 공산당이 우리나라에 가져온 공산괴질을 청소해야만 될 것이다.“
  • 핵 구름 (자료사진)
    ▲ 핵 구름 (자료사진)
    원자탄이란 단어를 입밖에 내진 않았지만 무슨 무기든지 다 사용하자고 촉구하는 이승만.
    원자탄! 그토록 깨부수고 싶었던 일본 제국주의가 원자탄 2개로 항복하는 것을 본 이승만은
    뒷날 휴전후 가난한 형편에도 ‘원자력 개발’에  집중한다.
    시험용 원자로를 도입하여 원자력연구소를 건축하는 한편 대학에 원자력학과를 설립하여 기술인력을 양성한다. 한양공대와 서울공대에 원자력학과가 잇따라 설립되었고, 그해 필자가 진학하던 1959년 공대지원생들이 인기 높은 첨단학과로 몰리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이제 대한민국은 원자력발전소를 수출하는 세계 최고의 원자력 대국이 되었는데
    새정권은 느닷없이 ‘탈 원전’을 강행하여 세상이 놀라고 세계가 웃고 북한이 낄낄거린다.
    26년전 노태우정권이 '비핵화 선언'으로 미군의 전술핵조차 철수시키는데 성공한 북한정권,
    퍼주는 남한 돈으로 핵개발에 성공한 그들이 지금 미국 본토 공격을 협박하며 조롱한다.
    핵전쟁의 불길이 금방이라도 덮칠 것 같은 핵폭풍 전야, 참 불쌍하고 불쌍한 대한민국이다..
    트럼프가 북한 김정은에게 말했다. “세계가 본 적 없는 화염과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72년전 트루먼이 일본에게 말했다. “지구상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형태로 공중에서 파괴의 비가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원자폭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쏟아져내렸다.
    이제 한반도 차례인가? 이승만이 살아있다면 뭐라고 할까.
    “그때 내 말 안듣고 휴전하더니, 그때 만주에 원자탄 투하하라 그렇게 일렀거늘...
    왜 또 우리 땅이냐? 핵개발 초장에 뿌리 뽑았어야지...이러다 적화통일이라도 된다면...
    오호라, 천벌이로다! 오 주여! 이 나라를 구하소서, 이 민족을 구하소서!“
    <계속>